조선초기(朝鮮初期)에 명성을 날린 영산 김씨(永山金氏)는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고려 정종(定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우찬성(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 : 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괄하던 정2품 최고군직)을 지냈으며, 종경(宗敬)의 손자 수온(守溫)은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의 명신(名臣)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441년(세종 23) 문과(文科)에 오른 수온(守溫)은 중시(重試)를 거쳐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하고,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있으면서 세종(世宗)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에서「치평요람(治平要覽」과「의방유취(醫方類聚)」편찬에 참여하였으나, 부사직(副司直)에 올라「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였다.
그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라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았으며,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고,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에 뛰어나 명(明)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나 항상 청빈하게 살았다.
1481년(성종 12) 병이 악화되어 운명이 가까워지자 자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부디「중용(中庸)」과「대학(大學)」을 많이 읽지마라. 내 이제 혼미한 중에서도 눈 앞에 서언한 것은 모두 중용과 대학의 글자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문에 깊이가 있었다. 담대의 석학(碩學) 구종직(丘從直)은 남의 표문(表文)을 써준 것을 보고 모래 위에 꿇어 앉으면서 "평일에 비록 공(公)의 문장이 교묘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경지에 이를 줄은 몰랐오."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수온(守溫)의 형(兄)은 신미(信眉)라는 불명(佛名)으로 탈속하여 웅문거필(雄文巨筆)로 명성을 떨쳤으며, 속리산(俗離山) 성불사(成佛사) 복천암(福泉菴)에 사리(舍利)를 남기고 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학행(學行)으로 의금부 도사(義禁莩事)에 천거되었던 곤(滾도)과 뛰어난 효행(孝行)으로 감찰(監察)에 증직된 언건(彦建)이 유명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낸 각(覺)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득진(得進), 부호군(副護軍) 염근(廉謹)·호덕(好德) 등과 함께 충효(忠孝)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영산김씨(永山金氏)를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