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로,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셨던 김수온(金守溫)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歌詞)이다.
현대어 풀이
其一
<풀이>
높고 큰 석가불의 끝없는 공덕을 이 세상 다하도록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其二
<풀이>
부처님의 하신 일을 말씀드리니, 만 리나 떨어진 곳의 일이시나 눈에 보는 듯이 여기십시오.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사뢰리니, 천 년 전의 말씀이시나 귀에 듣는 듯이 여기십시오.
其三
<풀이>
먼먼 전 세상에 (전생의 석가모니가) 임금 자리를 버리고 불도를 닦는 정사 앞에 앉아 게셨다. 오백 명의 전 세상 원수가 나라의 공물을 훔치고 지나갔다.
其四
<풀이>
(왕은 정사에 앉아 있는 보살이) 형님인 줄 모르므로, 발자취를 밟아가서 (보살이 도둑인 줄 알고 잡아다가) 나무에 몸을 꿰어 (화살로 쏘아) 목숨을 마치게 하셨다. (보살 소구담이) 자식이 없으므로 (대구담이) 그의 피를 모아 그릇에 담아서 남녀를 태어나게 하셨다. (소구담의 대를 감자씨가 이음)
또 다른 전문 풀이
[其一] 높고 큰 석가모니 부처의 그지없고 가이없는 공덕을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어찌 다 아뢰겠습니까.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아뢰고 아뢰어도 능히 다 아뢸 수가 없을 만큼 높고 크십니다)
[其二] 석가 세존의 하신 일을 말씀드릴 것이니 (우리 나라에서) 만 리나 떨어진 곳 (인도에서 일어난)의 일이지만 눈에 보는 것같이 여기소서.
석가 세존의 하신 말씀을 사뢸 것이니, 천 년 전에 하신 말씀이시지만, 귀에 듣는 듯이 여기소서.
[其三] 헤아릴 수 없는 먼먼 전 세상 시절에(한 보살이 ; 전생의 석가모니가) 임금의 자리를 버리시고 (도를 닦기 위하여) 정사(精舍)에 앉으시었습니다.
오백 명의 전 세상 시절 원수가 (도둑으로 태어나) 나라의 공물(公物)을 훔쳐 가지고 정사 앞을 지나갔습니다.
[其 四]
왕은 정사에 앉아 있는 보살이) 형님인 줄 모르므로 (도둑의)발자취를 밟아가서 (보살을 잡아다가) 나무에 몸을 꿰어 (화살로 쏘아) 목숨을 마치게 하시니, (보살 소구담이) 자식이 없으므로 (대구담이 보살의) 피를 모아 그릇에 담아서 남녀를 태어나게 하셨다.
요점 정리
의미 :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말로 석가모니가 중생을 교화함을 말함
연대
창작 : 세종 29년 (1447) 추정 ('석보상절'과 거의 같은 시기임)
간행 : 세종 31년 (1449)
작자 : 세종대왕
형식 : 악장, 서사시
내용 : 석가모니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 찬불가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찬불가(讚佛歌)이므로 궁중 음악에서는 사용 안됨
상, 중, 하 3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중 상권만이 발견되었다. 수록 작품은 모두 194장이나 이로 미루어 볼 때 전편은 580여 장이 될 것으로 추측됨.
제작동기 :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 바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세종께서 보시고 이 글을 지었음(두 500여 곡으로 된 3권의 활자본. 현재 상권 1책이 보물 398호로 지정)
의의
용비어천가와 함께 대표적인 신체 악장, 최대의 서사시(敍事詩)
15세기 국어의 귀중한 자료
불교문학의 정화(精華)
표기에 한글을 위주로 하여 한자를 협주로 한 점으로써 한글전용이 행해진 최초의 문헌으로 일컬어진다
참고 : <월린천강지곡>을 세조 5년에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합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라는 이름으로 간행함
이해와 감상
'월인천강지곡'의 '월인천강'은 밝은 달이 이 세상의 모든 강물에 고루 다 비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교화(敎化)가 온 세상에 가득함을 비유한 말이다. '其一'과 '其二'는 함께 '월인천강지곡'의 서장(序章)이다.
'其一'은 '용비어천가' 제 1장처럼 형식상 파격을 가져온 장으로 설의법과 과장법을 동원하여 끝없이 넓고 크신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였고,
'其二'는 2절 4구의 형식 을 갖추어 '용비어천가'와 같은 악장체 문학의 정형을 이루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멀고 아득한 석가 세존의 말씀과 행적을 아뢸 것이니, 현세에서 보고 듣는 듯이 여기라는 내용이다.
'其三'은 석가 세존이 태어나기 전 세상의 이야기로, 구담씨(瞿曇氏)의 내력을 밝힌 내용이다. 이렇듯 '월인천강지곡'의 내용은 불교의 연(緣)을 중심으로 한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의 배경 설화
헤아릴 수 없는 먼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임금으로 있다가 왕위[王位]를 아우에게 맡기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출가하여 구담 바라문(瞿曇拍羅門)을 만나 자기의 옷[王位]을 벗고 구담의 떨어진 옷을 입고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좌선(坐禪)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에 걸식(乞食) 하러 내려오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인 줄 몰라보고, 다만 구담의 제자라 소구담이라고 했다. 이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밭에 불도를 닦는 정사를 만들어 혼자 좌선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마침 500명이나 되는 도둑 떼가 나라의 제물을 훔쳐 가지고 보살이 좌선하고 있는 정사 앞을 지나갔는데, 이들은 보살의 500세(世)전의 원수였다.
참고 자료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金守溫)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歌詞)이다.
이 책의 표기법에 관하여 몇 가지 두드러진 점을 들어보면, ① 당시의 맞춤법은 모두 표음(表音)의 원칙, 즉 소리나는 대로 적는 원칙에 따랐다. 곧, ‘사ㆄ미怠,바翠(食), 머그니(食), 마가(防)…’ 식으로 풀이씨(用言)와 줄기(語幹)와 씨끝(語尾)과의 구분이 지켜지지 않고 표기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일이시나, 눈에, 말이시나, 일흠은, 담아, 안아, 안굼시니이다, 낮과, 곶우흰, 곶비, 맞나겝側며, 깊거다… ’ 등으로 비교적 현대 문법과 가깝다. ② 다른 문헌이 한자(漢字)를 앞세우고 그 밑에 한글로 음을 다는 표기법을 채택하고 있음에 비하여, 이 책은 그 위치가 반대로서 한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글을 사용하려는 주체성(主體性)의 발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③ 종성(終聲)이 없는 자리에 ‘ㅇ’을 붙이던 당시의 한자음 표기법을 볼 수 없다는 점 등이다.
이는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및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 등과 함께 정음 창제 당시의 언어연구로서 빼지 못할 자료가 되지만, 《월인천강지곡》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예술적인 독창성의 결여 때문에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는 못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산일되어 상권만이 전하다가 1961년 진기홍(陳錤洪)에 의하여 발견되어 3권으로 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1962년에 통문관(通文館)과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각각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또한 1995년 12월 발견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5에 새로운 《월인천강지곡》의 시 7수가 수록되었음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