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김씨(永山金氏)의 원조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이고 신무왕의 후손이다. 라, 여(羅, 麗) 양조에 걸쳐 출사입공해 오던중 고려말의 전객시령공이 영이 (令貽)는 쓰러져 가는 고구려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전력했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사직. 낙향할제 두 아들과 세 사위도 사직하고 영동(永同)으로 은거했다. 장자 판도판서 길원(吉元), 차자 판삼사 포(苞)와 장서 이부시랑인 순천박공 원용(元龍), 차서 한성판윤 구례장공 비(丕), 삼서 대제학 밀양박공 시용(時庸) 등 이상의 어른들은 여조에 벼슬했고 장서했다. 신왕조 조선이 개국되자 비로소 출사했으니 종경(宗敬)은 우천성을 이르렀고 이어서 아들 훈(訓)은 영의정이요 그 아들 수온(守溫)은 당대의 대학자요 이조 팔대 문장가로 많은 시문과 저서가 있었고 벼슬은 판서 대제학 영중추 부원군에 이르렀다. 특히 저서 월인천강지곡은 불후의 명작이다. 이하 후손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명인 달사가 많았지만 다 기록하기 어렵고 임정요인으로 조국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만리이역에서 서거한 김철(金澈)의 유해가 아직 환국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